News 경춘선 숲길: 걷다 보면 시가 되는 길 Travel 2024-10-21 Keywords 강혜빈 강혜빈에디터 경춘선숲길 정영선조경가 땅에쓰는시 경춘철교 노원구 공공도시텃밭 경춘선숲길공원 공릉동 올해 봄, 벚꽃 명소를 찾다가 경춘선 숲길을 알게 되었다. 퇴근 후 공릉역에서 내려 도보로 5분 남짓 걸었더니 일직선으로 쭉 뻗은 산책로가 보였다. 어둠이 내린 저녁, 가로등과 상점 불빛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벚꽃을 감상하는 대학생들과 동네 주민들의 발걸음이 더해지며 길 위엔 활기가 가득했다. 동네에 숨은 벚꽃 명소를 찾아 뿌듯했던 기억은 경춘선 숲길을 또다시 찾게 된 계기가 되었다.경춘선은 한때 여객과 화물을 실어 나르던 중요한 통로였다. 시간이 흘러 2010년 경춘선 복선전철화 사업으로 철도의 일부 구간은 운영이 중단되었으나, 도시 재생 사업을 통해 이곳은 ‘경춘선 숲길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이 숲길의 설계에는 국내 1세대 조경가이자 최초 여성 국토개발기술사인 정영선 조경가의 철학이 담겨 있다. 영화 ‘땅에 쓰는 시’를 통해 그녀의 이야기를 접한 후, 경춘철교에서 화랑대 방면으로 이어지는 약 3km 구간을 걸어 보았다. 정영선 조경가는 자연 경관과 사람을 잇는 ‘연결사’로 자신을 소개하며 모든 작업에 앞서 땅을 여러 번 방문해 주변 풍경과의 맥락을 파악한다고 했다. 지역의 고유성을 보존하고 현대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경춘선 숲길, 그곳에 녹아 있는 그녀의 조경관을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산책의 시작점이었던 ‘경춘선 방문자센터’에서 철교 방면으로 꽤 넓은 규모의 텃밭이 눈에 띄었다. 주변 시민들이 함께 가꾸는 공공도시 텃밭이자 마을의 공동 정원이었다. 개인이나 소규모 단체가 땅을 배분받으면 직접 농기구를 사용하여 작물을 재배할 수 있다. 농약이나 비료를 쓰지 않는 친환경 방식 덕분에 작물들이 유난히 큼직하고 푸릇해 보였다. 비 예보에 걱정스러웠지만, 짙은 풀 냄새와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겨웠다. 텃밭을 뒤로하고 경춘 철교로 향하는 구간에는 기차 레일을 사이에 두고 벤치가 있는 도보 구간과 자전거 도로, 잣나무 숲길이 이어져 있었다.간이역 벤치가 연상되는 곳을 지나 경춘철교에 다다랐다. 교각과 철로의 형태가 남아있는 것을 보고 과거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멈춘 철길은 이제 사람들의 추억과 발걸음을 이어주는 길로 다시 태어났다. 정영선 조경가가 중시하는 보존과 연결의 가치가 이곳에서 비로소 와닿았다. 숲길을 따라 곧게 뻗은 미루나무가 바람에 조금씩 흔들거리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 풍경을 보며 지나던 사람들이 사진을 부탁했고, 나도 모르게 그들의 추억에 작은 역할을 더했다. 비 때문에 우산을 쓰고 걸었지만, 오히려 깊어지는 가을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길가에 핀 꽃과 나무 옆에 자리한 이름표를 보며 사철나무, 벌개미취 등 낯선 식물의 이름을 하나씩 알아갔다.공릉동에 뿌리를 내려 활동하고 있는 어느 시인은 살아생전 아내가 궁금해했던 숲길의 야생화 이름을 알려주지 못해 두고두고 아쉬웠다고 한다. 그 아쉬움을 담아 그는 길에 피어난 들풀과 꽃 옆에 하나씩 이름표를 달았다고 한다. 누군가 아쉬움 속에 길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걷던 길에서의 추억을 시로 풀어냈다. 정영선 조경가 또한 땅을 보면 어울리는 시를 떠올린다고 했다. 때로는 풍경을 보고 시를 떠올리고, 시에서 영감을 받아 조경 설계를 완성하기도 했다. 공릉동 시인의 사연을 듣고 자연과 시에 진심인 정영선 조경가의 마음이 숲길을 거니는 사람들의 마음에 닿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숲길에서 시작된 호기심은 나를 오래된 식당으로, 책방으로 이끌었다. 공릉동 멸치국수 집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나왔을 때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비를 피해 경춘선 숲길의 마지막 코스로 정해 두었던 독립 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떤 책을 고를지 고민하는 나를 보고 책방 사장님이 시집 몇 권을 추천해 주셨다. 일상의 소재에 영감을 얻어 따스한 언어로 풀어낸 독립 출판 작가들의 시집이었다.영화 ‘땅에 쓰는 시’에서 정영선 조경가는 가장 평범하면서 수형이 예쁜 게 단풍이라고 말했다. 비 온 뒤 더욱 깊어진 가을 풍경은 붉게 물든 단풍을 볼 수 있어 더 아름답지 않을까? 영화에서 조경가가 파스텔을 문지르며 땅에 구현할 공간과 색을 흥얼거리듯 구상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녀의 손길이 닿을 새로운 땅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가 피어날까? 겨울이 오면 이 숲길은 또 어떤 시를 품을까 궁금해졌다. 노원구에서 맞이하는 첫 겨울은 가까운 친구와, 부모님과 함께 해야겠다. 에디터 강혜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