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엑스포(Expo)의 역사를 상징하는 건축물들 건축 디자인 2024-04-10 Keywords 엑스포 박람회 런던엑스포 수정궁 파리엑스포 에펠타워 엑스포건축 랜드마크 Expo LondonExpo ParisExpo 이상화 이상화에디터 2030 엑스포의 개최지가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로 선정되면서 기대를 모았던 부산 엑스포 유치가 불발되었다. 대한민국이 사우디아라비아와 경쟁할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회원국들의 투표에서 큰 표차가 나면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부산시가 2035 엑스포 유치에 재도전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가운데 이번 실패의 원인에 대한 냉정한 분석과 철저한 전략 수립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1993년 대전엑스포와 2012년 여수엑스포를 통해 2차례 인정박람회(전문엑스포)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바 있다. 부산 엑스포 재도전을 통해 등록박람회(월드엑스포)의 유치로 올림픽, 월드컵과 함께 초대형 국제행사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길 기대해 본다. 만국박람회 또는 세계박람회로 불리는 엑스포(Expo, Exposition internationale)는 선진 과학 기술을 통해 자국의 국력을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개최되었는데 1851년 영국이 하이드 파크에 수정궁을 지어 개최한 런던엑스포가 시초다. 엑스포의 태동을 조성한 건 프랑스였지만 세계 경제와 무역의 주도권을 얻기 위해 영국이 발빠르게 움직인 결과였다. 최다 관중인 65만 명이 참석한 런던엑스포가 성공하자 프랑스에 이어 서구 각국이 앞다투어 엑스포를 열었다. 수정궁이 런던엑스포의 상징이 된 것을 시작으로 개최국들은 랜드마크 건축을 새롭게 등장시켰다.런던엑스포가 산업화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 데는 개인과 단체가 내놓은 10만점에 달하는 상품들만큼 수정궁의 역할이 컸다. 수정궁(Christal Palace)은 건축가이자 정원 설계사였던 조지프 팩스턴(Joseph Paxton)이 거대한 유리 온실을 전시관으로 설계한 것이다. 가로 563m, 세로 139m, 높이 41m의 수정궁은 3800톤의 주철과 700톤의 연철 빔에 30만 장의 판유리가 사용된 이 건물의 면적은 7만1794㎡로 3만6000㎡인 삼성동 코엑스 전시장의 두 배에 이른다.그런데 배경을 보면 조직위의 출범이 늦어지면서 전시장은 경제적이면서 최대한 빠르고 단순하고 지어져야 했다. 공모에 255개의 설계안이 응모했지만 이중 조건을 충족시킨 것은 팩스턴의 설계가 유일했고 공장에서 생산한 모듈을 현장에서 조립하는 새로운 공법을 사용하면서 7개월에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1851년 런던엑스포를 위해 지어진 수정궁은 20세기 최고의 건축물로 불린다 [출처: www.bie-paris.org] 영국에서 수정궁의 탄생이 가능했던 것은 철제 교량과 건축에 대한 노하우가 갖춰진 상태에서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서 철강 제조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정궁은 건축에 강철을 사용한 것은 넘어 미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수정궁은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의 상징으로 백화점을 비롯한 초대형 쇼핑센터의 원형이 되었다. 수정궁은 엑스포가 끝난 후 교외인 시드넘으로 이전되어 전시장과 연회장을 갖춘 복합건물로 쓰이다 1936년 11월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1862년 런던에서 다시 엑스포를 개최되지만 기대만큼 관람객이 늘지 않으면서 런던엑스포의 열기는 식어버렸다. 반면 파리는 1900년까지 5번의 엑스포를 개최하며 방문객이 5,100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같이 파리가 도시 한가운데서 엑스포를 개최하는 데는 유젠 오스만(Eugène Haussmann, 1809~1891)의 대규모 도시정비 프로젝트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853년 시장으로 취임해 20년에 걸쳐 진행된 도시정비로 도로와 수로를 새로 놓고 정비했고 건축물과 시설물을 규격화 했는데 엑스포 개최 시기와 일치하면서 시너지를 낼 수 있었다. 엑스포를 통해 세계 문명의 수도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프랑스가 빛을 발한 것은 1889년 파리엑스포였다. 조직위원회는 파리엑스포에 프랑스 혁명 100주년에 맞춰 프랑스의 진보와 성취를 상징하는 최고의 건축물을 세우기로 결정한다. 국가 간의 우위를 다투는 엑스포에서 건축가 구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 1832~1923)이 세운 에펠타워를 내세운 프랑스가 대역전의 드라마를 쓰게 된다.1889년 파리엑스포는 파리에서 개최된 4번째 엑스포로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을 탄생시켰다 [출처: www.bie-paris.org] 에펠타워는 에펠 건축회사가 만들면서 불려진 이름이다. 에펠은 1867년 엑스포에 유리 건물을 지었지만 수정궁과는 비교가 되지 못했고 영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여론을 의식해 다양한 건축에 철골 구조를 시험했다. 그리고 가라비 철교(Viaduct de Garabit)를 계기로 에펠은 교량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자리 잡게 된다. 1886년 프랑스 정부가 파리엑스포에 철의 시대를 예고하는 걸작을 세우기로 하고 설계를 공모하게 되는데 에펠 건축회사의 공모안이 채택된다. 에펠은 교량에 사용된 아치 기술을 수직인 타워로 올리면서 기단, 몸통, 탑의 삼단 구조로 만들었다. 거미집 형태(Spidery System)로 설계해 중량과 하중의 부담을 줄이고 풍압에 유리하게 했다. ‘과학과 산업의 승리’라는 거대한 기념물로 시작한 에펠타워지만 여러 난관에 부딪힌다. 에펠의 공모안대로 만들 경우 프랑스 정부가 잡아 놓은 공사비 예산보다 500만 프랑이 더 필요하게 되면서 계획이 무산될 위기를 맞는다. 여기에 에펠은 정부의 부족한 공사비를 우선 부담하고 20년 동안 타워에서 나오는 수입금을 받는 조건으로 에펠타워를 세우기 시작한다. 예술도시인 파리의 미관을 해친다며 정부에 공사 중단을 요구하는 탄원서가 빗발치기도 했다. 시작 25개월만인 1889년 3월 15,000개의 철제를 2,500,000개의 리벳으로 연결된 중량 7,000톤 300미터 높이의 세계 최고의 에펠타워가 완공된다.엑스포 기간 200만명이 에펠타워의 존재에 감탄했고, 하루 평균 1만 2천명이 에펠타워를 찾으면서 에펠 건축회사가 부담했던 공사비는 1년만에 회수하는 쾌거를 거둔다. 에펠타워는 이렇게 파리엑스포의 상징이 되었으며 이후 파리의 랜드마크가 된다. 1909년 20년의 설치 기간이 끝나면서 에펠타워는 다시 철거의 위기에 처하지만, 최신 송신 안테나를 설치하는데 최적의 장소가 되면서 현재까지 파리의 심장으로 살아 고동치고 있다. 1889년 파리엑스포를 시작으로 파리를 에펠타워로 기억할 것이다. 에디터 이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