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집이 그리운 사람들을 위하여(Feat. 서도호 개인전, MMCA) Opinion 2026-11-08 Keywords 국립현대미술관서울 서도호개인전 집 삶의터전 안식처 기억이동관계 성북동한옥 가변적재료 모슬린천 러빙러빙 RubbingLoving 확장가능한기억의피부 고립과안도감 옷 최소한의집 최대한의옷 다리프로젝트 BridgeProject 가상의다리 기억과온기의공간 사유와연대의공간 미래의집 스티브에디터 생물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그의 저서 『총, 균, 쇠』에서 대륙의 형태와 환경이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각기 다른 궤적으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이 인류학적 명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사적이고 삶의 터전인 '집'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 모두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태어나 삶을 시작하지만, 그 집의 크기와 모양, 위치는 모두 다르다. 그리고 이 다채로운 집의 형태는 우리의 생활방식과 습관, 나아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까지 다르게 형성한다. 누군가에게 침묵의 고요함이 흐르는 공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텔레비전과 게임 소리로 채워진 친숙한 공간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이에게 집은 치열한 바깥세상의 경쟁에서 돌아와 숨을 고르는 안식처이며, 또 다른 이에게는 새로운 상상력이 싹트는 원천이 된다. 그리고 하나뿐인 집을 달팽이처럼 곁에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유목민처럼 거처를 바꾸어 가며 이곳저곳의 시공간을 누비며 사는 이도 있다.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에서 개최되는 ‘서도호 개인전’은 이처럼 우리가 '집'이라는 장소에 대해 품어온 수많은 질문과 다층적인 생각들을 대규모로 집대성해 보여주는 자리다. 2013년 서울관 개관 특별전 이후 13년 만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되는 두 번째 대규모 개인전으로, 2026년 8월 27일부터 2027년 2월 9일까지 관람객을 맞이한다. 유년기의 초기 드로잉과 사유의 씨앗을 보여주는 시드뱅크 섹션부터 대표적인 천 설치 작업, 조각, 탁본, 영상 등 500여 점의 작품을 아우르는 사상 최대 규모로 구성되었다. 성북동 한옥에서 시작해 뉴욕과 런던으로 이어진 작가의 삶의 궤적을 관통하며, 대지에 고정된 건물으로서의 집이 아닌 기억과 이동, 그리고 관계로서의 집이 지닌 깊은 사유를 우리에게 전해준다.서도호 작가에게 집은 예술 전반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원형인 동시에, 인간과 공간에 대한 더 넓은 질문으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이다. 그 출발점은 유년 시절 숨 쉬었던 성북동 한옥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70년대 도시 개발로 전통 한옥이 빠르게 사라져가던 시기, 작가의 아버지 서세옥 화백은 사라지는 원형을 계승하고자 성북동에 새로운 한옥을 지었다. 철거된 한옥에서 나온 고재(古材)를 전국에서 모으고, 창경궁 연경당 사랑채를 본따 조선시대 문살과 창호, 철물 하나까지 본래의 양식을 따랐으며, 대목장 배희한 장인이 참여하여 집요하게 완성한 집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성북동 한옥은 획일화된 도시의 풍경 속에서 전혀 다른 시간성을 간직하게 되었고, 이 집에서의 유년기 경험은 그의 작업에 끊이지 않는 원천이 되었다.이후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 유학 시절, 작가는 직물이라는 가변적 재료를 발견한다. 이는 특정 장소에 고정되는 기존 설치 미술의 한계를 넘어, 공간의 이동과 재설치를 가능하게 한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정교한 실측을 통해 자신의 스튜디오와 집을 유연한 피부이자 옷과 같은 모슬린 천으로 옮겨낸 작업은, 집을 고정된 건축물이 아닌 기억·이동·관계에 관한 유연한 탐구로 확장시켰다. 작가는 성북동 한옥의 서까래부터 기와, 창호 문살, 벽돌의 문양까지 반투명한 직물로 섬세하게 구현해 냈다. 나아가 '러빙/러빙(Rubbing/Loving)' 시리즈에서는 신체와 장소가 만나 축적한 시간을 탁본을 통해 촉각의 기록으로 남겼다. 이로써 집은 더 이상 특정 대지에 고정된 공간이 아니라, 주인의 이동을 따라 어디든 함께 옮겨가 다시 펼쳐질 수 있는 ‘확장 가능한 기억의 피부’로 다시 태어났다.또한, 서도호 작가에게 집은 인간이 감정적으로 마주하는 상반된 두 가지 가치를 동시에 품고 있는 장소다. 문을 잠그고 홀로 누리는 집 안에서의 완벽한 자유는 때로 외부 세상으로부터의 고립과 외로움이라는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반대로 집단과 사회,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느끼는 안도감은 타자의 시선과 규범에 갇히는 구속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국땅에서 낯선 집단과 마주한 개인의 감정을 들여다본 작가에게 집이란, 옷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남과 접속하기 위한 도구’이다.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면서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를 위해 옷을 입듯, 공간 역시 개인의 사적인 영역을 지켜주는 든든한 방패이자 타자와 소통하는 창구가 된다. “옷이란 최소한의 집이고, 집이란 최대한의 옷”이라는 그의 비유는, 인간이 타인 그리고 세계와 거리를 조율하며 맺어가는 관계의 본질을 명확히 보여준다.집과 환경이 바뀌면 우리는 직관적인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나 서도호 작가에게 이 불편함은 감각을 날카롭게 깨우는 ‘비옥한 사유의 토양’이자 창작의 발화점과 같다. 낯선 공간에서 신체가 직접 부딪히며 촉각을 세우는 순간, 우리는 과거의 기억과 씨름하게 되며 물리적·심리적·문화적 가치를 새롭게 바꾸어 놓는다. 살던 공간이 개발과 철거로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안타까움 역시 작가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자신이 머물렀던 장소의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 살던 곳이 사라지기 전에 그 공간을 더듬고 기억해 냈다. 집안에 존재하던 모든 문고리와 손잡이, 콘센트, 스위치, 전등에 이르기까지 소소한 사물들을 본래 위치 그대로 손끝으로 더듬어 실측하고 채집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머물렀던 집을 각기 다른 색으로 구분하여 반투명한 패브릭 형태로 세워 올렸다. 사라짐에 맞서 기억을 고정하려는 이 집요한 촉각의 채집은, 낯선 환경이 주는 두려움을 달래는 방식이자 잊혀가는 과거의 순간을 예술적 자산으로 승화시키는 근원이다.이러한 집에 대한 작가의 열망과 상상력은 1999년부터 이어져 온 ‘다리 프로젝트(Bridge Project)’에서 정점을 이룬다. 서울, 뉴욕, 런던 등 자신이 머물렀던 거대 도시들 사이에 가상의 다리를 놓고, 그 교차점에 집을 짓겠다는 발상이다. 고정된 대지에서 벗어난 이 비현실적이고 아득해 보이는 구상을 위해 작가는 건축가와 엔지니어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불러 모아 단계마다 마주하는 난제들을 하나씩 해쳐 나갔다. 이는 유년 시절 성북동 한옥에서 느꼈던 원초적인 온기와 안락함을 미래의 장소로 이식하려는 오랜 열망이자,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유연한 상상력의 절정을 보여준다.맹인과 코끼리의 우화를 보면 저마다 서로 다른 부위를 더듬으며 전체를 각기 다르게 상상하다가, 정작 진짜 코끼리의 참모습은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가 살아가는 집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각자가 경험하고 갈망하는 집의 형태는 저마다 다르기에, 어쩌면 우리는 집이라는 본질의 파편을 쥔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만지고 느끼는 공간의 조각과 기억들을 차례로 이어 붙인다면, 혼자서는 가늠할 수 없었던 훨씬 더 크고 아름다운 전체의 풍경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집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게 존재한다. 그러나 그 기억을 크게 펼쳐 함께 만들어 간다면, 집은 물리적 소유를 넘어 영원히 가슴속에 품고 싶은 기억과 온기의 공간이 될 것이다. 시간이 흘러 물리적 형태가 사라진 뒤에도 우리 안에 온기로 남아 영원히 나누고 간직하고 싶은 장소, 그 사유와 연대의 공간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그려나가야 할 미래의 집이 아닐까.〈둥지/들, 2024〉 폴리에스터 천, 스테인리스 스틸, 410 x 2,148 x 375 cm, 서도호 작가는 개인과 공동체, 집과 이동, 기억과 관계라는 보편적이면서도 근원적인 주제를 탐구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해 왔다. 반투명한 직물 구조로 세워 올린 공간은 대지에 고정된 건축의 한계를 넘어, 주인의 이동과 기억을 따라 언제든 다시 펼쳐지는 유연한 사유의 장소를 보여준다.〈작은문, 2017〉 STPI 수제 종이에 채색 젤라틴지, 실, 356 x 229 cm, 작가가 유년기의 온기가 깃든 성북동 한옥의 대문을 1:1 크기로 재구성한 작업이다. 이 작품은 공간과 기억, 과거와 미래를 잇는 관문으로서 이번 전시의 정서적 여정을 연다.〈러빙/러빙: 서울 집, 2013~2022〉 닥지에 흑연, 스테인리스 철사, LED 조명, 536 x 866 x 802 cm, 작가가 아버지와 자신의 자화상이라 부르는 성북동 한옥에 대한 촉각의 기록. 벽과 바닥, 문틀과 창석에 닥지를 밀착시키고 흑연과 색연필로 오랫동안 문질러 완성했다. 서로 다른 세대가 지나온 삶의 궤적이 집의 표면 위에 겹겹이 스며들어, 장소와 신체가 마주쳐 축적해 낸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묵묵한 촉각의 풍경을 전한다.〈완벽한 집: 런던, 호섬, 뉴욕, 베를린, 프로비던스, 서울, 2024〉 작가가 거쳐 온 여러 도시의 집에서 문손잡이와 콘센트, 스위치 등 소소한 건축적 세부들을 손끝으로 채집해 하나의 공간 안에 모아 놓은 작업. 흩어져 있던 기억의 파편들을 잇고 재구성함으로써,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가 교차하며 숨 쉬는 작가만의 유연한 ‘건축적 자서전’을 완성했다.〈타임 포켓(2021) 아카이브 벽면〉 작가는 손길이 오랫동안 닿은 사물에 시간과 기억, 삶의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다고 믿는다. 두 딸과 함께 창작의 과정을 나누며 수집한 소품들로 채워진 이 벽면은, 몸을 감싸던 옷이 집이 되고 그 집이 다시 몸으로 돌아오는 서도호 작가 특유의 '집과 관계의 순환'을 보여 준다.에디터 스티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