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대에 희망을 설계한 선구자: 건축가 김윤기(1904-1979) 건축가 김윤기(金允基, 1904-1979)는 혼돈의 시대에 희망을 설계한 인물이다.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학 건축학과에 최초로 입학한 그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조국의 미래를 건축으로 담아내고자 하였다. 졸업 후 조선총독부 철도국에 근무하면서 한국 전통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철도역사를 설계했고, 특히 인부들의 쾌적한 작업 환경까지 세심하게 배려한 점이 돋보인다. 동아일보에 ‘건강주택’ 연재를 통해 주거 문제와 삶의 터전 개선을 사회적 과제로 제기하였으며, 전통인 백의와 온돌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주택 개념을 제시해 당대 사회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광복 이후에는 정부 관료로서 철도·항만·도시 인프라와 농촌 생활 개선에 힘쓰며, 해운대 극동호텔(1962년)과 대한체육회 회관(1966년) 등 국민의 일상에 안식과 희망을 전하는 다양한 건축물을 완성하며 한국 근대 건축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Keywords 건축아카이브 ArchitecturalArchive 건축가김윤기 한국전통미를현대적으로재해석 건강주택 해운대극동호텔 대한체육회회관 민중회관 조선주가 조선총독부철도국 한국전통건축양식 팔작지붕 단청 전통문양창호 작업환경배려 조선건축회활동 조선과건축 전통과현대조화 민족자립 문화자긍심 전후복구사업 공영주택건설및보급 농촌생활개선 사회적책임건축철학 인간중심철학 우연한 기회로 건축학과에 입학하다 건축가 김윤기(金允基, 1904-1979)는 1904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나 개화된 가풍 속에서 성장하였다. 1920년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일제의 유화 정책으로 해외 유학 기회가 열리면서 일본 도쿄의 중학교 4학년에 편입하게 된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신문 기사를 접하면서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건축’이라는 단어조차 낯설던 시절이었지만, 현실적인 이유와 개인적인 동기로 건축을 선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김윤기는 조선인 최초로 일본 와세다대학 건축학과에 입학하였고, 기술자로 성장해 조국의 광복에 이바지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품게 되었다.극동호텔은 건축가 김윤기의 대표작 중 하나로, 1966년 부산에서 문을 연 국내 최초 특급호텔 중 하나이다. 당시 워커힐 호텔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였으며, 근대 부산의 도시 재생과 관광 산업 부흥의 상징적인 이정표로 여겨졌다. 세련된 디자인과 실용성을 겸비한 극동호텔은 지역 특성을 살린 건축미로 방문객들에게 편안함과 품격을 선사했다. 그러나 1979년 조선비치 호텔이 개장하고 여러 특급호텔이 경쟁적으로 생겨나면서, 극동호텔은 1989년 문을 닫아 아쉬움을 남겼다. [출처: Nature, 자연이 그리울 때, 석당미술관] 현장실습과 유학생 활동와세다대학 건축학과는 방학 기간 현장실습을 필수 과정으로 포함하고 있었으며, 건축가 김윤기는 재학 중 여러 차례 귀국하여 경주의 고건축물을 조사하고 동아일보 사옥 공사 현장 등에서 실제 현장 실습을 통해 탄탄한 실무 경험을 쌓았다. 그는 대학 내외에서 민족적 유학생 단체인 ‘한빛회’에 적극 참여하며 협동조합 발족과 국산품 장려운동에 앞장섰고, 외국문학연구회와 사이언스 클럽 조직을 통해 문학과 과학의 진흥에도 힘을 보탰다. 방학마다 고려공업회의 일원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과학과 산업에 관한 대중 강연을 펼치는 등 조국의 근대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28년 졸업 설계에서는 집회시설인 ‘민중회관’을 주제로 사회적 공간 설계에 도전하였으며, 졸업 논문 ‘조선 주가(住家)에 대하여’에서는 당시 열악했던 주거 환경 문제를 심도 있게 연구하였다. 이러한 학업과 활동은 건축가 김윤기의 현장 경험과 민족적 책임 의식을 바탕으로 한 건축가로서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그의 건축 철학과 실천을 뒷받침하는 토대가 되었다.와세다 건축학보에 실린 졸업설계 ‘민중회관(1928년)’ 도면은 사회적 공간으로서 공동체의 참여와 소통을 고려한 다층적 공간 배치를 보여준다. 이는 건축가 김윤기가 초기부터 인간 중심과 사회적 책임을 담은 건축 철학을 실천했음을 보여준다. [출처: 건축가 김윤기의 초년기 교육과정과 건축활동에 관한 고찰]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건축실무를 시작하다건축가 김윤기는 와세다대학에서 쌓은 학문과 현장 경험을 토대로 졸업 직후 조선총독부 철도국 공무과에서 건축 실무를 시작하였다. 그는 철도공작소와 기관차고 등 다양한 구조물의 설계와 시공을 맡으며 실무 능력을 키웠고, 수원역(1928년), 전주역(1929년), 남원역(1931년) 등 주요 철도역사를 한국 전통 건축 양식을 가미하여 설계하였다. 거대한 팔작지붕과 정교한 단청, 전통 문양의 창호와 인테리어에는 한국 고유의 미가 담겼으며, 특히 작업 환경 개선을 위해 환기와 채광, 위생 시설 설계에도 인부들의 건강과 작업 능률을 세심하게 배려하였다. 이에 더해 그는 조선건축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939년부터는 전문지 ‘조선과 건축’ 편집위원으로서 조선 건축계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인 최초로 철도국 기사에 승진하는 성과를 이루었고, 광복 때까지 철도국에서 근무하며 한국 근대 건축 실무의 토대를 마련하였다.한옥형으로 지어진 수원역사(1928년)는 전통 한옥의 미학과 현대 철도시설의 기능을 조화롭게 융합한 건축물이다. 목재와 기와 지붕을 활용해 지역적 정체성과 역사적 맥락을 담아내며, 공공 교통의 효율성과 문화적 쉼터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출처: 건축가 김윤기의 초년기 교육과정과 건축활동에 관한 고찰]‘건강주택(健康住宅)’으로 주택 혁신 제시건축가 김윤기는 1930년 동아일보에 ‘건강주택(健康住宅)’이라는 제목으로 총 9회에 걸쳐 글을 연재하며 당시 열악했던 조선의 주거 환경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근대적 주택 개량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채광과 환기를 개선하고 창호 면적을 확대하는 한편, 온돌 단열을 강화하며 2층 주택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등 가족실 설치까지 고려하며 위생과 채광을 모두 개선해 주거 쾌적성과 공간 활용도를 높이고자 하였다. 그는 단순한 건축적·위생적 문제를 넘어 심리적·사회적 영향까지 폭넓게 논의하면서, 주택 문제를 개인적인 사안을 넘어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과제로 규정하고 이를 극복할 방안을 모색하였다. 특히 전통적인 백의(白衣)와 온돌 문화를 존중하며,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주거 환경을 추구한 점이 돋보인다. 이 연재는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켜, 주택 문제가 민족 자립과 문화적 자긍심의 문제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세대 조선 건축가 김윤기는 1930년 동아일보 여성 칼럼 ‘가정부인’에 연재한 ‘주택 문제’에서 건강주택 설계 개념을 바탕으로 주거 환경의 근본적 변화를 모색하였다. [동아일보]시대를 품는 사회적 건축 철학건축가 김윤기는 광복 직후 미군정 운수부 건설과장으로 공직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교통부 자재국장, 1951년에는 시설국장 겸 철도건설국장을 역임하며 철도와 항만을 비롯한 기간 시설의 확충과 전후 복구사업에 헌신하였다. 이후 교통부와 건설부 장관으로서 국토 개발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특히 생활 개선과 주택 개량에 대한 여론을 선도하고 공영주택 건설 및 보급, 농촌 생활 개선 지도 등 주택 분야에서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그는 사회적 요구를 반영한 건축 설계를 통해 전후 복구와 경제 발전을 지원하며, 부산 해운대의 극동호텔(1962년)과 대한체육회 회관(1966년)을 포함한 여러 대표작을 완성하였다. 이 두 건축물은 전쟁의 상처 위에서 관광 산업과 공공 체육 문화의 새 출발을 알리는 기능적이면서도 지역 특색을 잘 담은 공간이다. 이처럼 건축가 김윤기는 시대의 혼돈 속에서도 건축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인간 중심의 철학과 깊은 문화적 통찰을 담아낸 선구자였다. 그의 작품은 그 시대를 살아낸 이들의 꿈과 희망을 품으며, 현대 한국 건축의 토대를 다지는 데 큰 족적을 남겼다. [참고 자료] 서울시 내 손안에 서울, 아카이브경성의 건축가들 (김소연, 루아크, 2017)건축가 김윤기의 초년기 교육과정과 건축활동에 대한 고찰 (김용범, 2013)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재래식 주거개선과 근대 위생미디어담론 (이홍렬 이경규, 2022) 에디터 스티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