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건축 보존에 평생을 바치다: 건축가 강윤(1899~1975) 건축가 강윤(姜沇, 1899~1975)은 종교적 신념과 민족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국 근대 건축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그는 3·1 운동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 교장 프랭크 윌리엄스의 소개로 일본에 있는 보리스 건축사무소에서 건축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디게 된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체계적인 건축 교육과 실무 경험을 쌓은 건축가 강윤은, 이화여자대학교 본관(파이퍼 홀, 1935), 태화기독교사회관(1939), 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1956),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본관(1956) 등 기독교 선교와 교육을 위한 건축물을 설계하며 한국 근대 건축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는 독립운동 공훈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1. 이화여자대학교 본관, 음악당, 중강당, 체육관 (1935년) 2. 이화여자대학교 기숙사, 보육관, 영어실습소, 가사실습소 (1936년) 2. 태화기독교사회관 (1939년) 3. 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 (1956년) 4.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본관 (1956년) Keywords 건축 아카이브 Architectural Archive 건축가강윤 영명학교 프랭크윌리엄스 윌리엄메렐보리스 보리스건축사무소 간사이공학전수학교 기독교선교와관련된건축 이화여자대학교본관 음악당 중강당 체육관 기숙사 보육관 영어실습소 가사실습소 태화기독교사회관 이화여자대학교대강당 수유리한국신학대학본관 3·1 운동에 뛰어들다 종교건축가로 불리는 강윤(姜沇, 1899~1975)은 충남 논산군 양촌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그 역시 기독교와 깊이 관련된 삶을 살게 된다. 공주 영명학교(현 공주영명고등학교) 수학시절,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인물은 교장 프랭크 윌리엄스(Frank Williams, 1883~1962) 선교사였다. 1916년 17세에 영명학교에 입학한 그는 솔선수범하고 학업도 열심히 해 윌리엄스 교장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1919년, 건축가 강윤은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다음 해인 1920년 그를 포함한 7명은 졸업식 없이 졸업장을 받게 된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그에게 윌리엄스 교장은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건축가 윌리엄 메렐 보리스(William Merrell Vories, 1881~1964)를 소개했고, 이를 계기로 그는 보리스 건축사무소에서 건축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디게 된다. 1923년, 간사이공학전수학교(현 오사카 공업대학) 건축과에 입학하여 3년제 야간 과정으로 체계적인 근대 건축 지식을 배웠다. 그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실무 경험을 쌓았고, 입사 7년차에는 프로젝트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교회, 학교, 병원, YMCA, 복지 시설 등 기독교 선교와 관련된 다양한 일본과 한국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했다. 튜더 고딕의 정수, 이화여대 본관을 설계하다 이화여전을 신촌으로 옮기는 캠퍼스 조성 사업을 보리스건축사무소에 의뢰하면서, 건축가 강윤은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건축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35년에 본관(파이퍼 홀), 음악당(현 대학원관), 중강당, 체육관을 준공했으며, 1936년에는 기숙사(현 진선미관), 보육관(현 대학원 별관), 영어실습소(현 영학관), 가사실습소(현 아령당)를 준공했다. 그 외에도 공주 공제의원, 태화기독교사회관, 대천 외국인 선교사 수양관 등의 건축에도 참여했다.이화여자대학교 본관은 미국의 파이퍼(Pfferffer) 여사가 새 캠퍼스 건설을 위해 1928년부터 시작한 모금 활동으로 거금을 기부받아 1935년 준공되었다. 보리스건축사무소가 건축 설계를 했으며, 건축 부감독은 건축가 강윤이 담당했다. 지상 3층의 본관은 튜더식 고딕건축(Tudor Style Gothic)으로 서양 석조건축의 고유한 돌쌓기인 네모막돌완자 쌓기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려대학교 본관과 구별된다. 흔히 알려진 고딕성당의 높은 첨탑과 뾰족 아치 대신 본관은 사각창호에 중앙부 3층에는 석재 트레이서리가 자리잡고 있다. 본관은 전장 54.56m의 긴 장방형 건물로 좌우에 날개형식을 가진 H자형 평면으로 좌우대칭이다. 건물은 사무실, 교실, 도서실, 식당 등으로 사용되었고 3층에는 300명 수용 가능한 소강당과 김애다(金愛多)를 기념하기 위한 기도실이 있다.이화여자대학교 본관(파이퍼 홀, 1935년)은 6.25 전쟁으로 출입구, 포치, 3층과 지붕 등이 크게 파괴되어, 1953년 복구공사를 거쳐 현재의 원형으로 복구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던 고려대학교의 근대 건축물들과 유사한 건축 어휘가 사용되었지만, 이화여자대학교 본관은 고전적인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모습이다. [국가유산포털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파이퍼 홀] 저항의 역사를 품은 건축, 태화기독교사회관건축가 강윤이 설계한 여러 건축물들 중 그가 가장 애착을 가졌던 건축물은 태화기독교사회관(1939)이었다. 이곳은 원래 태화관이 있었던 자리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체포되었던 저항의 역사가 깃든 장소였다. 그런 태화관을 태화 재단이 인수하여 여성 교육과 복지 사업을 실시하였고, 확장을 위해 새 건물을 짓고자 보리스 건축사무소에 의뢰했다. 건축가 강윤은 태화기독교사회관을 독립과 민족정신을 건축 언어로 승화시킨 지하 1층, 지상 2층의 한·양 절충식으로 설계했다. 그는 3·1운동이 선언되었던 장소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태화관의 자재들을 재활용하여 기와지붕을 만들었다. 벽체 하부는 화강석을 사용하고 상부는 회벽으로 마감했으며, 섬세하게 한옥 문양의 띠를 둘렀다. 예배와 교육을 위한 내부 공간은 건축주의 요구와 기능에 충족하는 서양식 평면으로 디자인했다. 예배당은 높고 웅장한 고딕풍으로 꾸미고, 구조재인 목조 트러스와 나무 의자에는 태극 문양을 새겨 넣었다. 태화기독교사회관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건축가에 의해 태화관의 역사적 상징성을 표현한 복합 공간이다. 1940년 말, 총독부가 미국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태화기독교사회관을 몰수해 종로경찰서로 사용하면서 건물을 개조했다. 개조에 비협조적이던 건축가 강윤은 태극 문양 제거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국가유산포털, 태화복지제단]‘강윤건축’의 이름을 되찾다보리스건축사무소는 서울에 경성주재사무소를 개소하여 운영했으나, 전운이 고조되면서 사업을 중단해야 했다. 1941년, 건축가 강윤은 보리스건축사무소 경성출장소를 '강윤건축'으로 변경 등록하려 했으나, 총독부에 의해 거절당했다. 결국 회사 이름을 일본 이름인 '오하라공무소'로 바꿔 등록하였고, 해방 후에야 비로소 '강윤건축설계사무소'로 다시 변경할 수 있었다. 그는 종로2가에 사무실을 내고 건축설계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그의 사무실에서 대한건축학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는 선교부에서 부탁받은 건물들과 중앙대학교, 한국신학대학교 등의 설계를 맡았으며, 미8군에서 발주하는 공사를 자문하기도 했다. 그는 다시 '고려토건사'라는 건설회사를 설립했고, 한국전쟁 후에는 이화여대 대강당(1956),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본관(1956) 등을 설계했다. 동양 최대의 고딕 건축, 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은 1956년 이화여자대학교 창립 70주년 기념사업으로 준공된 철근콘크리트조 지하 2층, 지상 5층 석조 건축물이다. 튜더풍 외관과 첨두형 아치(Pointed Arch) 등의 고딕 양식이 특징인 건물은 건축가 강윤이 설계를 맡았다. 준공 당시 3,500석 규모의 객석과 무대를 갖춰 '동양 최대의 학교 건축물'이라는 위용을 자랑하며 전쟁의 폐허 속에서 교육과 문화 부흥을 염원했던 당시 시대적 열망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수도 서울의 중요한 예술공간으로서 각종 공연은 물론, 국가적 행사와 주요 기념식 등이 개최되며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은 1965년에 건물의 좌우 부분을 증축하였으며, 2001년에는 무대를 확장하고 최신 음향설비를 확충하는 등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시행하였다. 튜더풍 외관과 첨두형 아치 등 준공 당시의 고딕 양식의 특징을 비교적 양호하게 간직하고 있어, 건축사 및 예술문화사적 측면에서 보존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이화여자대학교] 선구자의 쓸쓸한 퇴장해방 전에는 일본인에 의해 건축계에서 비주류였던 조선인 건축가들 사이에서도, 일제가 물러가자 새로운 주류와 비주류가 형성되었다. 과거 일제가 설립한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총독부에서 건축 실무를 한 건축가들이 주류였다면, 해방 후에는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이어받은 서울대학교 건축과 출신이 새로운 주류를 형성했다. 이들과는 아무런 공통분모가 없었던 건축가 강윤은 1950년대 중반부터는 건축계를 주도하던 대한건축학회로부터도 멀어지게 된다. 그는 대한건축학회의 창립 멤버로서 가장 어수선한 시절 총무부 이사를 맡아 건축계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주류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1960년대에 들어서는 건축실무마저 접어야 했다. 그가 보리스건축사무소에서 익혔던 고전주의 양식은 한국전쟁 이후 폐허를 복구하며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건축이 유행하던 시대에는 더 이상 통하기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1967년 뇌출혈로 반신불구가 되면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그는 고통 속에서 살다가 1975년 생애를 마쳤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외롭게 고군분투하다 생을 마감한 그였지만, 독립운동 공훈을 인정받아 200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고 2006년에는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그 가치를 뒤늦게나마 인정받았다. 신념으로 지은 시대의 건축과 그의 노력건축가 강윤이 평생 애착을 가졌던 태화기독교사회관은, 그의 삶과 많이 닮은 듯하다. 태화기독교사회관은 원래 순화궁이 있던 자리로, 1907년 이완용의 별장이었다가 '태화관'이라는 음식점으로 바뀌었다. 3·1 운동 후 태화관은 다시 남감리회 여선교부가 인수했고, 1939년 그에 의해 한·양 절충식의 태화기독교사회관으로 새롭게 건축되었다. 하지만 1940년 말, 총독부가 태화기독교사회관을 몰수하여 종로경찰서로 사용하게 된다. 일제 말기,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태화기독교사회관이 존폐의 위기를 맞을 때마다, 건축가 강윤은 그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태화기독교사회관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인 1979년에 결국 철거되면서 한 건축가의 평생이 담긴 노력 역시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참고 자료] 서울시 내 손안에 서울, 아카이브경성의 건축가들 (김소연, 루아크, 2017)김승제, 한국의 건축가-강윤(1)~(3) (건축사, 1996) 한국의 근대문화 유산 Vol.1 (우정디자인기획) 에디터 스티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