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고딕양식에 지역성을 더하다: 건축가 박동진(1899-1980) 건축가 박동진(朴東鎭, 1899~1981)은 박길룡과 함께 한국 근대건축의 출발점에 있는 인물이다.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공대 전신) 건축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건축부를 거치며 여러 건축을 설계하는 등 둘은 비슷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건축가 박동진은 독립운동에 가담하면서 방랑과 갈등의 시간을 보내고 입학한지 9년째인 1926년 졸업한다. 같은 해 조선총독부 건축과에 들어가면서 그의 건축 인생을 시작하여 왕성하게 활동한다. 이 시기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본관(1934년)과 중앙도서관(현 대학원 도서관, 1937년), 조선일보사옥(1935년)을 설계하여 여러 건축물들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1.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본관, 중앙도서관 (1934~1937년) 2. 조선일보사옥 (1935년) 3. 중앙고등보통학교 본관 대강당 (1936∼1937년) 4. 고려대학교 과학관 (1960년) 5. 고려대학교 이공대학 본관 (1964년) Keywords 건축 아카이브 Architectural Archive 건축가박동진 한국1세대건축가 한국근대건축 모더니즘 경성공업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고려대학교 조선일보사옥 중앙고등보통학교 화강석 풍토성 고딕양식의석조건물 완자쌓기 오산고등보통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명신중학교 평안공업학교 학교건축 대전지방법원 명륜동자택 백인제외과병원 영락교회 박동진건축연구소 기신건축연구소 건축가 박동진, 위대한 건축가를 꿈꾸다건축가 박동진(朴東鎭, 1899~1981)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1917년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공대 전신) 건축과에 입학했다. 평소 미술을 좋아하던 그가 선배들의 충고로 경성에 새로 생긴 건축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 근저에는 중학교시절 배웠던 미켈란젤로가 미술가인 동시에 위대한 건축가라는 것과 장래에 건축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박길룡보다 3년 일찍 입학해 근대식 건축교육을 받았지만 1919년 3.1독립운동에 가담하면서 1926년인 27세에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技手)로 입사하여 기사로 승진하고 1938년 사직할 때까지 실무로 참여했으며 부업으로 작품에 집중하며 여러 대표작을 설계한다.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본관(1934년)과 중앙도서관(현 대학원 도서관, 1937년) 그리고 조선일보사옥(1935년)을 설계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다.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본관은 화강석을 주재료로 좌우대칭의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다. 고딕 양식의 건물임에도 높은 기단을 없애고 바로 1층으로 걸어들어 갈 수 있게 했고 조선의 전통인 완자쌓기를 사용했다. 본관은 1934년에 지어져 70년이 넘는 역사 동안 본교 캠퍼스를 지키고 있다. [국가유산포털] 중앙도서관(현 대학원 중앙도서관)은 본관 완공 1년 후인 1935년 개교 3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착공되었다. 건축가 박동진은 본관 설계로 신뢰를 얻게 되면서 중앙도서관의 설계 전권을 일임 받을 수 있었다. 본관의 왼쪽 언덕에 화강암으로 중후한 고딕 양식의 5층 건물로 지어졌다. 디자인은 미국의 듀크대학 도서관을 참고하였다. [국가유산포털]재래주택 개혁론을 주장하다건축가 박동진은 신문이나 잡지에 건축에 관한 글을 집필했다. 곡선과 건축미(신동아, 1931년), 우리 주택에 대하여(동아일보, 1931년), 조선주택개혁론(춘추, 1941년) 등의 건축 글을 쓰며 서구 근대건축을 소개하고 우리 주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당시에는 합리성, 경제성, 효율성을 강조한 모더니즘 건축이 인기를 끌면서 그는 재래건축으로 삶의 변화를 담아 낼 수 없다고 보았다. 건축가 박길룡은 절충적이고 타협적인 재래주택 개량론을 펼쳤다면, 건축가 박동진은 ‘전통과 인습에 얽매인 건축에 반항(우리 주택에 대하여-3, 1931년)’에서 재래주택 개혁론인 모더니즘 건축과 온돌 폐지를 주장했다. 건축가 박동진은 변화에 맞는 건축의 본질을 규명하고 설계에 모더니즘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는다. 동아일보에 실린 보성전문학교 본관 스케치 및 우리 주택에 대하여 기사 [동아일보] 조선일보사옥(1935년)은 건축가 박동진이 모더니즘으로 설계한 초기 작품으로 장방형의 단순한 입면과 비대칭적 평면으로 건축되었다. [대한건축사협회]고딕 양식의 석조건물로 풍토성과 기풍을 담다건축가 박동진은 새로운 터전에 새로운 교사를 지어 조선 최고의 민족사학을 키우고 싶었던 건축주 김성수(金性洙, 1891~1955)와 의기투합했다. 건축주 김성수의 자택 2층에 사무실을 차리고 그곳에서 숙식하며 보성전문학교 본관 설계에 매달렸다. 유럽 대학의 고딕 건축을 적용하고 근대적인 공법인 철근콘크리트와 무근콘크리트를 구조에 화강석을 외장재로 사용했다. 화강석은 민족학교에 어울리는 강인하고 영구적이며 건축가 박동진이 주장하는 풍토성과도 맞아떨어지는 재료였다. 그리고 완자창의 문양을 응용하여 서양건축에서 없는 완자쌓기를 건축에 적용했다. 석조 고딕건축은 건축가 박동진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면서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 본관 대강당 과학관(1935∼1936년), 경성의 중앙고등보통학교 본관 대강당(1936∼1937년), 재령의 명신중학교 본관 과학관 기숙사(1937∼1939년), 평양의 평안공업학교 본관 대강당(1940년) 등의 학교건축으로 이어졌다.고딕양식의 외관, 근대건축기술의 철근콘크리트 뼈대와 조선 전통의 완자쌓기, 화강석이라는 풍토성을 결합시킨 석조의 고딕건축은 건축가 박동진의 트레이드마크이다.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등학교) 구 본관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1937년 건축가 박동진의 설계로 다시 지어졌다. [중앙고등학교]석조 고딕에서 벗어나 모더니즘 디자인으로건축가 박동진은 조선총독부를 1938년 사직하고 그 다음해 건설 회사인 ‘태평건물주식회사’를 설립했지만 활동은 오히려 침체되었다. 전시체제로 큰 프로젝트가 없어 대전지방법원(1939년), 명륜동 자택(1943년), 백인제외과병원(1944년), 영락교회(1948년) 등 몇 개의 석조주택과 병원 설계에 그쳤다. 그러나 1953년 박동진건축연구소를 개설하고 그의 안정적인 후원자였던 김성수의 도움으로 해방 후 종합대학이 된 고려대학교의 건물들을 설계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고려대학교 서관(1955년, 1961년), 외인교수 사택(1956년), 농과대학(현 사범대학, 1956년), 학생식당(1956년), 신관(현 대강당, 1957년), 여학생회관(1958년), 과학관(1960년), 박물관(1962년), 이공대학 본관(현 제2공학관, 1964년)을 차례로 건축한다. 그의 건축은 1960년대에 이르면 석조 고딕에서 완전히 벗어나 철근콘크리트의 구조미가 돋보이는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디자인으로 변화한다.건축가 박동진은 과학관(상단)과 이공대학 본관(하단)에서 석조고딕 건축에서 벗어나 근대주의 미학인 모더니즘을 구현했다. 과학관(1960년)과 이공대학 본관(1964년)은 각각 교양관과 제2공학관으로 사용되다 신축과 리모델링 되었다. [고려대학교]학교건축, 한국 건축사에 큰 획을 긋다건축가 박동진은 1960년 기신건축연구소로 발전시켜 작품활동을 진행하였고 고려대학교 이공대학 본관 설계를 마친 1964년 미국건축가협회의 초청으로 1년간 미국과 유럽의 건축을 답사했다. 이후 일선에서 물러나 미국에서 1980년 향년 81세로 타계하였다. 미국의 근대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을 좋아한 건축가 박동진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본관과 도서관 등을 대표적인 건축물로 남기며 한국 건축사에 큰 획을 그었다. 그럼에도 그의 건축물 중 고려대학교의 외인교수 사택(1956년), 여학생회관(1958년), 과학관(1960년)이 철거되고 이공대학 본관 또한 리모델링을 거치면서 옛 모습을 찾기 힘들어졌다. [참고 자료] 서울시 내 손안에 서울, 아카이브경성의 건축가들 (김소연, 루아크, 2017)건축가 박동진에 관한 연구 (안창모, 1997)한국인 건축가의 근대성에 관한 연구 (조창섭 박길용, 2002)에디터 스티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