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건축의 출발점에 서다: 건축가 이훈우(1886~1937) 건축가 이훈우(李醺雨, 1886~ 1937)는 한국 근대건축의 출발점에 있는 인물이다. 그는 현재까지 알려진 최초의 근대 건축가로 근대 건축교육을 받고, 자신의 건축사무소를 개업하여 건물을 설계했다. 당대 건축의 조형적 트렌드를 접목하고 대규모 프로젝트를 설계할 만큼 실무적 능력도 뛰어났다. 그는 병원, 학교, 언론사 사옥 등 공공건축을 설계했으며 언론을 통해 건축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소명하기도 했다. 당시 단어조차 익숙지 않은 ‘건축’이라는 영역에서 그가 선구자로 알려지며 다시 주목받고 있다. Keywords 건축 아카이브 Architectural Archive 이훈우 이훈우건축가 근대건축가 한국근대건축 이훈우건축공무소 천도교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 진주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조선일보평양지국사옥 낙동미술관설계도 민립서울병원 이상화 이상화에디터 건축가 이훈우, 한국 근대건축의 초기 활동했던 역사적 인물 건축가 이훈우가 주목받게 된 것은 한국 근대건축사에서 그의 활동 시기가 가장 앞선 것임을 밝힌 ’건축가 이훈우에 대한 연구(2020년, 유대혁·김현경·황두진)’가 한국 건축역사학회 학술지에 소개되면서다. 이는 최초의 한국인 근대건축가가 박길룡 건축가(1898~1943)로 알려진 그간의 통설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시기적으로 보면 1920년 세워진 이훈우 건축공무소가 박길룡 보다 10년 정도 앞서 활동한 사실을 밝혀냈다.1925년 1월 개관한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은 한국 근대건축의 선구자로 최근 재조명되고 있는 건축가 이훈우의 대표작이다. 시국 행사와 함께 다양한 문화, 스포츠 이벤트가 이곳에서 열렸으며 1970년대 3·1대로를 확장하면서 건물이 철거되었다.정규 건축 교육을 받은 한국 건축가의 출현 건축가 이훈우(李醺雨, 1886~ 1937)는 경상남도 하동 출신으로 1908년 일본 나고야고등공업학교(現 나고야공업대학)에 외국인 특별생으로 진학해 근대 건축 교육을 받았다. 그는 건축사, 설계, 장식법, 제도와 같은 창의적인 과목과 함께 건축재료, 시공법, 건축위생, 측량과 같은 기술적인 과목을 배웠다. 귀국해서는 조선총독부 건축기수로 근무하며 조선총독부 청사 건축에 관여한 한국인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부산중학교(1913년)와 천도교가 경영하던 보성고등보통학교(1914년), 동덕여학교(1915년) 등이 그가 이 무렵 설계한 것이다.건축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파악한 일본은 근대화 초창기부터 대학에서 건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일본인 엘리트 건축가들의 몫이었고 하위 개념의 교육을 받았던 한국인은 도구적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건축가 이훈우가 받은 교육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근대건축 교육이 시작된 것은 1916년으로 경성공업전문학교(경성고등공업학교)가 설립된 것이 유일하다. 그리고 대학에서 건축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946년 서울대에 건축학과가 설립된 이후다.독립하여 개인 작업을 시작하다1920년, 건축가 이훈우는 총독부 기수직을 사퇴하고 이훈우 건축공무소를 개업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의 종로3가 단성사 부근에 위치한 했으며 이것은 한국인이 개업한 유일한 건축사무소였다. 이는 1932년에 개업한 건축가 박길룡 보다 12년 빨랐다. 이시기 세워진 건축으로는 천도교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1924년), 진주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1928년), 조선일보 평양지국 사옥(1929년) 등이 있다. 언론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으로, 그는 ‘주택, 어떻게 개량할까? (동아일보, 1923년)’, ‘우리의 주택, 구조부터 고쳐야 한다. (중외일보, 1927년)’를 통해 위생 측면의 주택 개선과 가옥 구조 변경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일본에 유학해 관립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뒤 총독부에서 근무하다 퇴사하고 건축사무소를 차려 최신 서양식 건축 설계와 제도, 공사감독, 준공검사, 토목공사 등의 업무를 홍보하는 이훈우 건축공무소의 지면 광고 (동아일보 1921년 3월 18일)1911년, 첫 작품 ‘낙동미술관’을 고국에 짓기를 꿈꾸다 지금까지 알려진 건축가 이훈우의 첫 작품은 1911년 그가 일본 나고야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면서 앨범에 남긴 도면으로 된 졸업작품이다. ‘낙동미술관 설계도’란 제목의 건축물은 거대한 반원형 돔구조에 프랑스 신고전주의풍 대칭형 외관을 하고 있다. 좌우대칭의 건축 구도와 벽체와 창문의 사실감 있는 묘사에서 그의 능숙함과 건축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그가 고국에 짓기를 꿈꿨던 ‘낙동미술관 설계도’는 김현경 서울대 강사가 일본 나고야공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을 수소문 끝에 찾았다. 1921년, 민립 서울병원의 설계를 맡다건축사무소를 개업하고 건축가 이훈우가 맡은 업무는 민립 서울병원 건축을 위한 설계였다. 당시 콜레라가 유행하면서 전염병원으로 유일하게 운영되던 순화원 하나만으로는 어려운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에 전염병 환자를 격리 수용할 수 있는 병원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면서 기부금을 모아 성북구 성북동에 병원을 건립하는 계획을 세운다. 이때 건축가 이훈우는 재능기부로 병원 설계를 맡았지만 민립 서울병원 건립은 자금 부족 등을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1924년, 천도교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을 설계하다1924년, 건축가 이훈우는 천도교 교조인 최제우(대신사)의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을 설계한다. 현재를 고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어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당 마당에 160평 2층 건물로 지어졌다. 이곳에서 음악회, 미술 전시회 등 수많은 행사가 무료로 열리면서 일제강점기 한민족의 종합문화센터 역할을 했다. 또한, 성신여대와 한양대 등이 이 건물에서 개교했으며 이후 문화극장 건물로 쓰이다가 1970년대에 철거되었다. 1928년, 진주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설계하다건축가 이훈우는 1928년 고향인 경상남도 하동과 가까운 진주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설계한다. 연면적 320평의 2층 본관과 100평 정도인 대강당을 신축했으며 본관은 벽돌조의 위풍당당한 서양식 건물로 건축되었다.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는 보성전문 재단이 세운 민족사학으로 식민 지배자들의 집요한 방해 속에 어렵게 지어져 지역 명문으로 성장했다. 건물을 건축하고 수리하는 부서인 경상남도 영선과도 이 시기 그가 설계한 것이다.그의 마지막 행적, 1929년 조선일보 평양지국 사옥을 설계하다 건축가 이훈우는 1929년 5월에 사무소를 지금의 종로구 묘동인 수은동으로 이전한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조선일보 평양지국 신사옥을 신축한다. 평양 수옥리에 위치한 조선일보 평양지국 신사옥은 연면적 70평의 2층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석재와 벽돌로 마감한 전형적인 서양식 건축이다. 약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2층에서는 한국 1세대 사진작가인 서순삼(1903∼1973)의 개인전이 같은 해 열리기도 했다.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그의 행적은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참고 자료]건축가 이훈우에 대한 연구 (김현경, 유대혁, 황두진, 한국건축역사학회 2020)건축가 이훈우에 대한 추가 연구 및 관련 자료 (김현경, 유대혁, 황두진, 한국건축역사학회 2021) 에디터 이상화